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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 복시치 :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더 빛났을 스트라이커의 표상

즐라쭈리 2019. 6. 13. 04:12

 

[TFT] 알렌 복시치 :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더 빛났을 스트라이커의 표상

ALEN BOKŠIĆ: THE BRILLIANT PROTOTYPE BUILT TO PLAY IN ANOTHER DECADE

[ These footvall times = Dan Canican ]

 

1998년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한 순간은 크로아티아의 축구 역사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나라의 모든 스포츠 역사를 통틀어 최고일지도.

2000년 윔블던 오픈에서 고란 이바니셰비치의 동화 같은 우승이나 역경의 시대에 얻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농구 은메달이 거론 될 만하다. 하지만 1998년 월드컵에서의 성과는 논외다.

다보르 슈케르의 골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토너먼트에서 즈보니미르 보반과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 두 천재가 그라운드를 수놓는 동안, 크로아티아의 가장 재능 있는 선수 중 한 명은 먼발치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의 세대에서 알렌 복시치는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 이었다. 하지만 대회 시작 몇 주전 당한 무릎 부상 탓에 프랑스에서 ‘Vatreni’ (크로아티아 축구 대표팀을 의미하며, 개척자라는 뜻)의 위대한 약진을 함께하지 못했다. 복시치는 예선에서 9경기 4골을 넣었는데, 우크라이나와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중요한 동점골을 터뜨리기도 했다.

크로아티아 입장에서도 복시치를 잃은 것이 큰 타격이었겠지만, 복시치 개인에게는 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28세의 복시치는 폼이 최고조에 올랐고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2년 전 유로 96으로 첫 메이저 대회를 맞이했지만, 머리 부상으로 고란 블라오비치와 교체되 나가면서 고작 73분밖에 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명이 복시치를 저버린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1987년, 유고슬라비아 축구 협회는 복시치가 월드 유스 챔피언십(현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보다 국내 리그에 더 많이 뛰는 것이 도움될 것이라고 여겼고, 그를 명단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청소년 대표팀은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3년 후, 운명의 장난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문제였다. 이비차 오심 전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감독은 복시치를 1990 월드컵 스쿼드에 포함시켰지만 대회 내내 그를 벤치에 앉혔다.

결국 3년 뒤, 복시치는 이탈리아 라치오에서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한편, 대표팀에선 유고슬라비아의 파란 유니폼이 아닌 크로아티아의 빨간색 체크 유니폼을 입었다.

1987년, 복시치가 프로에 입문한 클럽인 하이두크 스플리트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유망주에서 유럽 대륙에서 가장 재능 있는 선수로까지 발전을 이뤘다. 모든 대회 174경기에서 60골을 터뜨리면서 득점력도 뽐낸 것.

그 중엔 1991년 유고슬라브 컵 결승에선 레드스타 베오그라드를 상대로 터뜨린 골도 있는데, 이때 차지한 우승이 4년 동안 들어 올린 두 번째 트로피였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면서 유고 연방의 마지막 트로피가 됐다.

 

 

1993년 마르세유에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몇 달 뒤, 복시치가 라치오의 연고인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발칸 반도 내전이 한창이었다. 복시치는 1-0으로 이긴 AC 밀란과 결승전에서 골을 넣지는 못했으나, 팀내 공동 최다 골(프랑크 소지와 더불어 6골)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그룹 스테이지의 마지막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렸는데, 이 골은 마르세유가 1990-91시즌에 이어 두 번째 유러피언 컵 결승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풀 시즌을 뛴 1992-93시즌, 복시치는 리게 앙 최다 득점자였다. 그는 23골을 넣어 마르세유가 라이벌 파리 생제르맹을 승점 5점차로 따돌리고 타이틀을 차지하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그러나 리그 5연패 자축연은 너무 이르게도 식어버리고 말았다. 올림피크 마르세유의 회장 베르나르 타피가 챔피언스리그 결승을 앞두고 발랑시엔과 경기에 승부조작을 시도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 클럽은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시즌 중 2부리그로 강등 처분을 받았다.

복시치는 1993-94시즌 12경기를 뛰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클럽은 팀의 중요한 자산 중 하나인 그를 처분해야만 했다. 타피 스캔들과 강등으로 마르세유는 스타들을 잡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세유는 복시치를 판매하는 대가로 큰 이적료를 원했으나, 라치오가 그를 영입하는 데는 150억 리라(약 105억 원)가 들었다. 1993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복시치보다 높은 표를 받은 선수가 로베르토 바지오, 데니스 베르캄프, 에릭 칸토나 셋 밖에 없을 정도로 스타가 됐으나, 복시치의 가격표는 꽤 낮은 감이 있었다.

복시치는 그의 새 동료들이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우디네세에 2-1로 승리하는 것을 관중석에서 지켜봤고, 이탈리아 신문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는 복시치를 두고 “붕괴 직전의 클럽에 돌진하는 스타”라고 묘사했다.

 

 

슬프게도, 복시치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라치오에서 세 시즌 동안 그는 이따금씩 병약한 라치오의 두통을 완화시키는 듯 했으나, 결코 라치오의 완벽한 치료제가 되지는 못했다.

1994-95시즌이 시작하고 디노 조프로가 사임하자 즈데넥 제만이 라치오의 사령탑이 됐다. 축구관이 확고한 제만은 복시치와 의견 차이가 컸고, 로마에 남는 일은 복시치에게 있어 불편한 동거와도 같았다.

마르세유에선 2경기 당 1골 이상을 몰아치는 스코어러였지만 세리에A에서 67경기 17골은 보잘것없는 성과였다. 복시치는 커리어 내내 골문 앞에서 작아지는 선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전 유벤투스 체력 코치인 지암피에로 벤트론은 복시치를 두고 ‘400m 육상선수’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복시치는 발군의 운동능력을 자랑했다. 많은 면에서 복시치는 시대를 앞서 있었다. 90년대, 전통적인 9번의 공격수들이 슬그머니 다이나믹하고 민첩한 스트라이커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고, 복시치는 현대적인 스트라이커의 표상과도 같았다.

피지컬적으로도 뛰어나지만 훌륭한 테크닉과 가공할 속도를 지닌 복시치. 그는 많은 이들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선수였다.

 

옛 크로아티아 동료였던 슬라벤 빌리치는 복시치와 다보르 슈케르와 비교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사실 나는 누가 더 나은지 잘 모르겠다”

“센터백으로써, 복시치를 상대한다면 도살당하겠지. 뛰고, 드리블하고, TV 화면 밖으로 나가버려 나를 차고, 깨물고, 뭐든지 할 것이다. 하지만 골은 넣지 못하겠지”

“슈케르? 꽤 괜찮은 경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걸?”

“하지만 두 골 정도는 먹힐 것 같아”

분명히 능력이 차고 넘치는 선수였지만, 득점력은 복시치의 강점이 아니었다. 433경기에서 134골을 넣은 것이 반증하지 않는가. 세리에A에서는 137경기 34골이다. 그 중 세 골은 당시 유럽을 지배한 유벤투스 소속이던 1996-97 시즌에 나왔다.

라치오의 새 감독, 제만의 접근법에 신물이 난 복시치는 1996년 여름, 140억 리라(약 96억 원)의 이적료에 토리노로 향했다. 그는 같은 해, 라 레푸블리카와 인터뷰에서 “진짜 문제는 제만의 훈련 방식이었다”며 “제만의 훈련 세션은 선수들을 망가뜨린다. 두 시즌 동안, 난 햄스트링을 네 번이나 다쳤다. 그런 방식으로 선수를 대해선 안된다” 라고 독설을 가했다.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유럽의 패자가 된 유벤투스였지만 올드레이디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지안루카 비알리와 파브리치오 라바넬리, 파울로 소사가 팀을 나가고 복시치, 크리스티안 비에리, 지네딘 지단이 합류했다.

마르첼로 리피 감독은 유벤투스의 막강함을 국내외로 널리 알리기 위한 수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지단이 놀라운 성공을 거둔 반면, 복시치가 비안코네리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놀라운 골을 터뜨린 순간뿐이었다.

그 골은 복시치가 토리노에서 뛰는 단 한 시즌 동안 터뜨린 7골 중 한 골에 지나지 않았다. 문체상으로 맨유전 골이 유벤투스 시절 가장 멋진 골이었다고 한다면, 볼로냐전 결승골은 타이틀 레이스에 결정적이었다고 회자될 정도로 가장 중요한 골이었다.

 

여섯 경기가 남은 상황, 유벤투스는 홈에서 우디네세에세 0-3으로 뭇매를 맞은 뒤, 파르마를 단 승점 1차로 앞서고 있을 뿐이었다. 복시치의 볼로냐전 골은 마찬가지로 홈에서 우디니세에 0-2 패배를 당한 파르마와 승점차를 4로 벌리는 역할을 했다.

결국 스쿠데토 레이스까지 세 게임을 남기고, 파르마는 홈에서 유벤투스와 승점차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올드레이디는 엔니오 타르디니에서의 힘든 원정경기를 1-1로 마무리했고, 시즌 마무리까지 두 게임을 앞두고 24번째 세리에A 우승을 확정지었다.

토리노에서 단 한 시즌을 보냈지만, 뮌헨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한 수 아래로 여겨지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1-3 패배를 당하며 실망스러운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다.

리그 타이틀과 인터 컨티넨탈 컵 우승을 차지했지만(부상으로 모나코에서 열린 유러피언 슈퍼컵 결승 1,2차전은 결장) 복시치가 알프스 산 아래 머무는 동안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득점 부족과 몇 차례의 부상은 유벤투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고 리피는 그를 로마로 돌려보낼 때라고 확신했다.

 

 

라치오를 떠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복시치는 250억 리라(약 175억 원)에 라치오로 돌아갔다. 그가 4년 전 처음 합류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한 팀이 되어 있던 팀 말이다.

스벤 고란 에릭손이 제만 대신 지휘봉을 잡았고 세르히오 크라뇨티 구단주는 막무가내로 돈을 써댔다. 비안코셀레스티는 낙오자의 팀에서 우승후보로 진화해 있었다.

복시치가 라치오로 돌아와 치른 첫 해는 그가 세리에A에서 보낸 시즌들 중 최고였다. 모든 대회를 통틀어 38경기 15골을 터뜨렸고 리그에서만 26경기 10골을 폭발시켰다. 더렵혀진 마르세유에서의 공적을 제외한다면, 1989-90시즌 하이두크 스플리트에서 27경기 12골을 터뜨린 뒤로 첫 두 자리 수 득점이었다.

10골 중 하나는 홈에서 삼프도리아를 상대했을 때 나왔는데, 그가 이탈리아 무대에서 터뜨린 골 중 가장 멋진 이라고 할 수 있다.

 

골문에서 40야드 떨어진 지점에서 볼을 받아, 두 명의 수비수에 둘러 싸였지만 한 명을 제치고 두 번째 수비수를 알까기로 제쳐버렸다. 그리고선 페널티 박스 앞 아크에서 멋진 왼발 칩샷으로 파브리치오 페론 골키퍼를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페론은 박수까지 쳤다.

복시치는 훌륭한 스코어러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명백한 원더골 메이커였다.

골은 그다지 많이 터뜨리지 못했을 지라도, 트로피는 확실히 들어올렸다. 로마로 돌아온 첫 시즌, 복시치는 AC밀란을 합계 3-2로 꺾고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달성했다. 이듬해는 대륙컵의 영예도 안았다. 그는 컵 위너스 컵 4강 1차전, 1-1로 비긴 로코모티브 모스크바 원정에서 귀중한 후반 막판 동점골을 터뜨렸다. 이후 버밍엄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마요르카에 2-1로 승리했고, 비안코셀레스티는 사상 처음으로 유럽 대회 우승 셀러브레이션을 벌였다.

 

 

 

 

4개월 뒤, 라치오는 트로피 진열장에 두 번째 유럽대항전 트로피를 추가했다.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트레블을 달성한 맨유를 1-0으로 격파한 것이었다.

모나코에서 거둔 맨유전 승리가 전 시즌 유럽에서 거둔 성공을 대표한다고 한다면, 1999-00시즌은 라치오 팬들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경험한 시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1973년 이후로 두 번째 리그 타이틀을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을 묻어야만 했던 순간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리그 8경기가 남겨 놓은 시점에서 리그 1위 유벤투스에 승점 9를 뒤지고 있을 때라면 말이다.

남은 7경기 중에서 6경기를 이기고 심지어 유벤투스 원정에서 승리까지 거뒀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 휘슬이 울린 상황에서도 승점 2가 모자랐다. 하지만 라치오가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레지나를 3-0으로 두들겨 패고 있을 동안, 유벤투스의 리그 타이틀 수성은 오리무중이었다.

홍수로 페루쟈 홈 경기장이 물이 가득 찼고, 1시간 가까이 경기가 지연된 중단됐기 때문이다. 경기가 재개되고, 페루쟈 센터백 알레산드로 칼로리가 결승골을 터뜨렸다. 클럽 역사상 두 번째 스쿠데토를 따낸 라치오 팬들은 그의 이름을 클럽의 설화에 새겼다.

3년 동안 두 번째 우승으로 복시치의 라치오 2장은 막을 내렸다. 이탈리아에서 마지막 시즌에 34경기 8골로 꽤 괜찮은 활약을 펼친 복시치는 이탈리아 생활을 청산하고 잉글랜드 미들스브러로 향했다.

 

미들스브러가 복시치의 연봉으로 250만 파운드(약 38억 원)를 내건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받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데뷔전에서 두 골을 터뜨리며 코벤트리에 3-1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복시치가 잉글랜드 무대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로 알려지면서 상황이 틀어졌다. 감독인 브라이언 롭슨은 “일 주일에 6만 3천 파운드(약 9500만원)?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라며 일축시키려했다. 복시치의 주급에 대한 루머는 드레싱 룸에서 끊이질 않았다.

롭슨이 경질되고 테리 베너블스와 스티브 매클라렌이 감독 자리를 대신했음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복시치의 EPL 두 번째 시즌에는 가레스 사우스게이트가 영입됐다. 그는 “동료들이 복시치를 좋아하지 않음을 느꼈고 쉽게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며 “보로에서 맥클라렌의 비전은 모두가 함께 뛰며 아무도 특별 대우를 받지 않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로에는 두 가지 룰이 있었다. 알렌을 위한 규칙과 나머지를 위한 것 말이다”

만성적인 부상 문제와 특혜 의혹이 있긴 했지만 복시치의 미들스브러 시절은 꽤나 괜찮았다. 그는 보로에서 첫 두 시즌 동안 팀 내 최다 득점자로 남았을 뿐 아니라 데뷔 시즌에는 올해의 보로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엔 올드 트래퍼드 맨유 원정에서 골을 터뜨리며 팀에 승리를 선사했는데, 무려 1973년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6개월 뒤 박싱데이엔 또 다시 맨유를 상대로 선제골을 터뜨리며 팀의 3-1 승리에 기여했다.

 

2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복시치가 프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맨유전 골이 그의 커리어 마지막 골이 됐다. 더는 몸이 따라주지 않은 것이다.

어느 정도 적절하게도, 유럽 축구를 매료시킨 한 남자가 가장 막강한 상대 중 하나와 일전에서 그의 커리어를 마감하는 역작을 남긴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가장 위대한 재능으로 남아있다. 그의 플레이스타일 상, 조금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의심의 여지 없이 더 널리 전설로 인정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원문 링크

https://thesefootballtimes.co/2019/03/13/alen-boksic-the-brilliant-prototype-built-to-play-in-another-dec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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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시치를 처음 본 것은 델 피에로의 유벤투스 250골 모음 영상에서였습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파란 유니폼을 입고 알레의 그 유명한 백힐 골을 어시스트한 선수가 바로 복시치였죠.

저는 키다리에 기술이 좋은 선수들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비에리가 그랬고, 로마의 델 베키오도 좋아했고, 즐라탄에 푹 빠졌죠. 복시치도 비슷한 유형입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세대가 한참 빨라, 하이라이트 필름을 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운이 좋게도 90년대 중반 라치오 경기를 두 경기 정도 구해 볼 수 있었는데, 복시치를 보고 있노라면 더 센스 넘치는 델 베키오가 떠오르더라구요.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고, 피지컬로 수비를 파괴할 수 있는 윙어였습니다.

1996-97 챔피언스리그 결승을 보니 스피드까지 갖췄더군요. 고전하기는 했지만 유연한 몸놀림으로 알레의 골을 어시스트 해냈습니다.

주로 최전방 포워드 중에서도 쉐도우 역할을 맡았는데, 베르캄프를 생각하면 참 비슷하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보다야 공격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는 없고, 포스트플레이, 측면으로 빠지는 움직임이 많죠.

복시치의 장점은 사이드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순간 순간 센스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스프린트도 할 줄 알면서 기술로 수비를 바보로 만들 줄도 압니다. 짜릿한 칩샷은 복시치의 전매 특허죠. 그야말로 감각적인 공격수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 선수입니다.

한 눈에 꽂힌 선수였는데, 이 선수에 대해 알게된지 10년이 넘어서야 글을 써보네요. 국내에서는 복시치에 관한 글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해외 칼럼에서 복시치를 다룬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운의 사나이, 감독과 맞짱 뜰 수 있는 성격, 원더골 메이커, 엄청난 피지컬에 우아한 기술... 그야말로 제가 좋아라 마지않는 즐라탄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 저자가 밝혔듯, 복시치가 20년만 늦게 태어나 90년생으로 현역으로 뛰고 있더라면 얼마나 높게 평가 받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즐라탄 뒤를 이어 좋아할만한 선수를 찾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많은 의역과 오역이 판을 칩니다만 너그러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