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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렌티나의 고통스러운 죽음 : 체키 고리 이야기 본문
[TFT] 피오렌티나의 고통스러운 죽음 : 체키 고리 이야기
THE PAINFUL DEATH OF AC FIORENTINA
[These Football Times = Angelo Sylvester]
1999년 11월 23일 밤, 도시 ‘플로렌스’는 황홀경에 빠졌다. AC 피오렌티나가 챔피언스리그 2차 조별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홈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로 불러들여 2-0으로 격파했던 날이다. 맨유는 불과 몇 달 전 역사에 남을 트레블을 기록한 팀이었고 피오렌티나는 최상위 유럽 대항전에 처음 나간 팀에 지나지 않았다. 피렌체 서포터들은 영광스러운 날을 만끽했다.
지오바니 트라파토니는 명망이 높고 단호하며, 감독으론 슈퍼스타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터치라인을 활보하던 그는 휘파람을 불어대며 선수들을 결집시켰다. 주장이자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는 거의 마음만 먹으면 득점할 수 있었고, 세 시즌 연속으로 20골 이상을 때려 넣고 있었다.
이탈리아 영화계의 거물인 비토리오 체키 고리는 비올라를 세계적인 팀으로 만들고자 했다. 1998-99시즌을 꽤 훌륭히 치른 피렌체는 이듬해는 더 많은 수확을 거두고자 했고,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장애물은 없는 듯했다.
모든 것들이 잘 돼가고 있었고 투스카니 지방의 주도이자, 멋진 성당을 자랑하는 도시의 팀의 미래엔 탄탄대로가 놓인 듯했다. 하지만 이는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2년이 조금 지나고, 피오렌티나라는 클럽은 소멸되었다. 파산과 온갖 스캔들로 점철된 클럽은 세리에 C2에서 ‘ACF 피오렌티나 비올라’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새로운 구단주와 함께 과거의 영광은 추억 속으로 묻어야만 했다.
정말이지 믿기 힘들고 가파른 추락이었으며, 클럽의 빛나는 역사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따르는 전제조건처럼 아름다웠고, 비극에 걸맞게 시들어버렸다. 그리고 축구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는, 기대감이 사라진 상태로 내동댕이 쳐졌다.
1990년 5월엔 피렌체 거리에 폭동이 일어났었다. 두 번의 굴욕적인 사건이 광적인 팬들을 폭도로 만들었고, AC 피오렌티나의 구단주였던 파비오 폰텔로의 시대에 종말을 고했다.
첫 사건은 UEFA 컵 결승전에서 숙적 유벤투스를 꺾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팬들은 강등권에서 사투를 벌이는데 이골이 났고, 지옥의 나날들에 방점을 찍길 바랐다. 하지만 2차전을 홈에서 펼치지 못하는 등 논란이 많은 패배를 당하자 팬들은 폭발했다.
두 번째 사건은 더 충격적이었다. UEFA 컵 결승전 이틀 뒤, 클럽의 위태로운 재정 상황 때문에 폰텔로는 피렌체의 스타이자 이탈리아의 영웅인 로베르토 바지오를 세계 최고 이적료에 유벤투스로 팔아치웠다. 이는 갓 난 상처에 소금을 붓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도시는 아비규환이었다. 팬들은 폰텔로가 클럽을 팔고 회장직을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
폰텔로는 신변에 위협을 느낀 데다 부채를 해결할 능력도 없었다. 그리고 클럽은 이탈리아 영화계의 거물 마리오 체키 고리의 손에 들어갔다.
마리오 체키 고리는 피렌체의 구세주처럼 여겨졌다. 유명하고 성공적인 영화 제작자이고, 비즈니스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니까.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의 자금력은 클럽을 빠르게 안정시켰다. 뛰어난 선수들도 다시 영입됐는데, 어시스트의 마법사 프란체스코 바이아노나 슈테판 에펜베르크 같은 탑 플레이어들은 물론, '바티골'이 피렌체 땅을 밟은 것도 이 시기였다.
바티스투타는 1990년대 피오렌티나 중흥기의 기수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클럽 최다골의 주인공이자 피오렌티나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거론될만한 선수니까. 심지어 그가 선수로 뛸 때 이미 피오렌티나 홈구장 앞에는 10피트에 달하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두 시즌 반 동안 체키 고리는 클럽을 일관성 있게 발전하는 클럽으로 만들어 놓았다. 피오렌티나는 1991년과 1992년을 12위로 마감하며 익숙했던 강등권과는 일단 멀어졌다. 하지만 타이틀 레이스와는 아직 거리가 멀었고 이즈음 감독을 두 번이나 바꾸며 새로운 선수들을 줄줄이 영입했다.
그리고 1992-93시즌을 순조롭게 출발하며 변화를 예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해가 바뀌고 체키 고리는 건강이 악화되자 그는 더는 클럽을 운영할 수 없다고 판단, 그의 아들인 비토리오에 경영권을 물려줬다.
“비토리오를 잘 부탁하오“ 죽어가는 마리오 체키 고리는 아들에게 클럽의 전권을 물려주기 전, 미디어계 거물이자 친구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게 당부했다. ”그 애는 충동적이고 순진하다오“ 결과적으로 비토리오는 아버지의 평이 틀렸다는 것을 거의 증명하지 못했다.
비토리오가 클럽을 맡은 뒤 처음으로 한 일은 팀이 아탈란타에 0-1로 패하자 감독인 루이지 라디체를 경질한 것이었다. 비토리오는 전에 팀을 맡았던 알도 아그로피를 선임했고 6위였던 피렌체는 그대로 급락해버렸다. 아그로피 체제하, 피렌체는 남은 21경기에서 단 15골을 넣는데 그쳤고 3승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세리에 B로 강등당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굴욕감을 느낀 비토리오는 아그로피를 해임하고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에게 1993-94시즌을 맡겼다. 당시 라니에리는 80년대 후반 칼리아리를 맡아 세리에 C1부터 세리에 A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주목받았고 강등권의 소방수로 이름을 날렸다.
피렌체는 세리에 B를 찢어발겼다. 그들은 38경기에서 단 5경기를 패배했고 53득점 19실점을 기록했다. 비토리오 체키 고리가 새로 런칭한 영화 제작사가 흥하면서 세리에 A 시절 스쿼드 대부분이 유지됐고, 결정적으로 바티스투타를 지켰다. 수많은 빅클럽들이 군침을 흘렸으나 바티는 팀을 지켰고, 16골을 넣으며 비올라를 한 시즌만에 세리에 A로 복귀시켰다.
그리고 영광의 나날들이 시작됐다.
1994-95시즌, 세리에 A로 복귀한 피오렌티나는 10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기대보단 낮은 순위였지만 비상의 전조를 보이기엔 충분했다. 라니에리는 피오렌티나가 미래에 거둘 성공의 초석을 다졌는데, 실용적인 라니에리식 4-3-3을 사용하면서 바티스투타를 중심으로 팀을 재정비해 그를 26골, 카포칸노니에레(세리에 A 최다 득점자)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듬해, 루이스 올리베라와 루이 코스타가 영입되며 피오렌티나는 무시할 수 없는 팀으로 거듭났고, 비로소 코파 이탈리아 우승 트로피를 따내며 오랜 투자의 결실을 거뒀다. 더 나아가 수페르 코파에서 스쿠데토의 주인공이었던 AC 밀란을 2-1로 꺾기까지 하며 사상 최초로 수페르 코파에서 리그 우승 팀을 꺾은 컵 대회 우승 클럽이 됐다.
비올라 사단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장장 20여 년 만에 들어 올린 첫 트로피였으며 진짜배기 슈퍼스타들이 매력적인 축구를 펼쳤다. 그 누구도 체키 고리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지 않았고 이제야 클럽이 제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본 비올라 제국은 속부터 무너져가고 있었다.
비토리오 체키 고리가 그의 아버지가 남긴 재산과 영화 제작사를 물려받았을 때, 그는 사업을 더 키울 방법을 찾고 있었다. 1995년, 그는 MTV의 이탈리아 자회사인 텔레 몬테카를로와 비디오뮤직을 사들이고 투자함으로써 RAI와 피닌베스트의 텔레비전 독점 구도를 견제하려 했다.
하지만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음에도 세리에 A TV 중계권을 얻는 데 실패했고 시청률은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수익성이 없는 채널들은 엄청난 손실을 낳고 말았고 결국 팔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큰 타격은 1999년 그의 별거 중인 아내이자 여배우, 가수까지 했던 리타 루시치가 공식적으로 이혼한 뒤, 영화 제작자로 나서면서부터였다. 리타의 성공은 체키 고리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혼 위자료가 1억 달러를 넘겼으니 말이다. 비토리오는 실로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됐다.
한편, 아르테미오 프란키의 사정은 달랐다.
1998년, 세계적인 명장인 지오바니 트라파토니가 바이에른 뮌헨에서 피렌체로 오면서 근 10년 만에 본격적인 타이틀 레이스를 펼치는 팀으로 거듭났다. 3위로 시즌을 마쳐 챔피언스 리그 예선 자격을 확보한 피렌체는 이듬해 녹아웃 스테이지까지 진출하는 등 선전했다.
하지만 1999-00시즌을 7위로 마감한 이후 트라파토니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아 떠났고 비올라의 심장과도 같았던 바티스투타가 로마로 떠나버렸다.
2000-01시즌, 바티는 그가 오랫동안 찾아 헤맨 스쿠데토를 따냈지만, 피렌체는 최고의 스타를 잃었음에도 처음 감독직을 맡은 로베르토 만치니의 지도 아래 여섯 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2대에 걸친 체키 고리 가문이 이룩한 비올라 제국이 무너지려면 현대판 카타스트로피가 일어나야만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 카타스트로피는 실제로 찾아왔고, 장장 75년에 걸친 클럽의 역사는 아르노 강 속으로 침수돼버렸다.
2001년 6월, 피오렌티나의 자금 부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피오렌티나는 선수 임금 체불로 총 5000만 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었고 행정 관리 체제가 됐으며 선발 11명 중 대부분을 팔아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비올라는 2002년 세리에 B로 강등됐으며 파산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본을 확보하지 못한 체키 고리는 도산의 정도가 매우 심해 도저히 리그에 남을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7월, AC 피오렌티나라는 클럽은 소멸되고 말았다.
피오렌티나가 종말을 맞이했던 2002년 7월 보다 1년 전에, 체키 고리는 그 종말의 전조를 예감하고 있었다. 2001년 여름 클럽의 재정 문제가 공개되고, 로마 검찰청에 의해 자금 세탁을 시도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으니까.
7월 5일, 경찰은 로마 보르게세 궁전에 있는 체키 고리의 대저택으로 들이닥쳤다. 1시간 반의 수사 끝에, 그들은 체키 고리가 그의 애인인 모델 발레리아 마리니와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침실은 유리 벽 뒤에 숨겨져 있었으며 두 겹으로 숨겨져 있었다.
금융 서류를 찾기 위해 ‘비밀의 방‘을 뒤지고 있을 때, 경찰 당국은 금고에 숨겨져 있던 코카인 더미를 발견했다. 붉게 물든 손의 체키 고리는 “코카인이요? 그거 사프란인데요”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금 세탁과 마약류 소지 정도는 피오렌티나 팬들의 가슴에 박힌 단검이라고 쳐줄 수도 없었다. 정말로 그들의 가슴을 후벼 판 것은 클럽이 파산 신청을 한 지 두 달 뒤에 일어났다. 바로 체키 고리가 AC 피오렌티나와 관련된 횡령과 사기 파산이라는 새로운 혐의로 가택 연금됐다는 사실이었다.
2006년엔 체키 고리가 구단으로부터 3200만 달러를 불법 횡령해 모회사인 Finmavi로 자금을 조달한 후 다른 사업 이자를 해결하려던 사실이 발각됐다. 한때 피오렌티나가 아름다운 축구를 펼친 시기를 책임졌던, 피오렌티나의 가장 위대한 구단주였던 이는 가장 클럽을 나락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돼버렸다.
2002년 8월, AC 피오렌티나가 사라진 이후, 새 클럽이 그 자릴 대신했다. ‘Associazione Calcio Fiorentina e Florentia Viola’라는 이름의, 줄여서 피오렌티나 비올라라고 불린 구단 말이다. 현 구단주이자 가죽 사업의 큰 손인 디에고 델라 발레가 회장을 맡은 그 클럽은 이탈리아 4부 리그인 세리에 C2에서 출발했다. 2003년 델라 발레는 피오렌티나의 옛 이름과 엠블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사들였고, 이 클럽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ACF 피오렌티나다.
AC 피오렌티나의 이야기는 이탈리아 축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 중 하나다. 비토리오 체키 고리의 부도덕한 통제가 낳은 모든 트러블과 굴욕적인 사건 이후, 팀은 3위에 올랐던 1999년보다 더 높은 순위에 오른 적이 없다. 리즈 유나이티드나 포츠머스 등 축구계에서 재정적 실패를 겪은 다른 사례들과 비교해도, 피렌체의 비극이 전하는 비통함이 특히 두드러진다.
하지만 비올라의 이야기로 한 가지 위안을 삼을 수 있다.
재벌들이 방향성 없이 클럽에 돈을 쏟아부으며 팬들의 팀에 대한 애정을 장난감 다루듯 했던 시기에, 피오렌티나에 있었던 일련의 비리들이 오늘날 재정적 페어플레이(FFP)와 엄격한 통화 규제를 낳았다는 점이다.
원문 링크
https://thesefootballtimes.co/2016/03/02/the-painful-death-of-ac-fioren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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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세리에A 7공주 시기, 한 자리를 차지했던 피오렌티나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론 7공주 중에선 전력상 처진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사실 66년생으로 선수생활 황혼기(1999년)에 입단한 안젤로 디 리비오가 무려 2005년까지 뛰면서 세리에C1으로 떨어진 팀이 다시 세리에A 무대를 밟는 걸 보고 은퇴했으니 어마어마한 레전드라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적절한 사진을 찾지못해 디 리비오 이야기를 하지 못했네요. 어쨌든 20골을 보장하는 바티골을 보유했고, 당시 난다 긴다 하는 공격형 미드필더 가운데서도 시야와 패스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루이 코스타가 있던 팀으로 유명하죠
하지만 제 개인적인 감상은, 피오렌티나 축구는 사실 그리 재밌진 않았습니다. 수비도 약한 편이었고, 한 방에 의존하는 팀이라고 봐야 옳았죠. 양 윙백인 디 리비오-하인리히가 상당히 견실했던 것도 떠오르네요.
그 시절 영상을 구해다보면 피렌체는 거진 두들겨 맞는 역할... 그래서 제겐 7공주 중에서 가장 처진단 느낌이 있었고, 구단 파산이라는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름만 들어봤던 체키 고리의 방만한 경영이 실로 어마어마 하군요...
그리고 이 글을 보면서 당시 체키 고리가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자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저 시기에 에펜베르크, 뭐 전성기가 지났다곤 해도 미야토비치나 키에사 같은 선수들을 수급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더욱이 세리에B로 떨어졌음에도 바티, 에펜베르크를 지켰단건 실로 어마어마한 연봉을 줬다는 의미기도 하겠죠.
7공주 중에서도 몰락한 것이 대표적으로 파르마와 피오렌티나, 라치오인데 그 중에서도 피렌체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막과 맥락에 대해 알 수 있는 포스트였습니다. 개인적으론 꽤 많은 정보를 얻었고 만족스러운 포스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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